7. 아브라함 가정의 역사와 어머니 하나님

‘약속’이나 ‘예언’이나 장래에 이행할 것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약속’과 ‘예언’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인용할 때 ‘예언의 말씀은 이것이니’라고 하는 대신에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롬9:9)

여기서 ‘약속의 자녀’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약속의 자녀’를 ‘예언의 자녀’ 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자녀’라고 이해하면 혼란스럽지 않고 뜻이 명확해집니다.

그런데 장길자 여인은 ‘약속’이라는 단어가 같다고 해서 이 구절을 엉뚱한 말씀과 짝을 지어 황당한 해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영생이니(요일2:25), 약속의 자녀는 곧 영생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녀가 됨으로써 영생을 얻고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약속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김주철 저,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 283페이지)

사도바울이 이삭을 ‘약속의 자녀’라 한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창세기 기록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육적인 능력이 아닌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김주철은 요한일서의 생명이라는 단어로 연결하여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의해’ 라는 점을 강조하여 엉뚱한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요한일서 2장의 영생을 허락받는 문제와 갈라디아서 4장의 약속의 자녀 문제는 전하고자 하는 핵심 요지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만 따로 영생의 약속을 주셨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